비평가 김다혜 (@issanghye)
돌멩이, 유리 조각, 진흙, 내리는 비, 절벽, 피로한 발.
개개의 단어를 쉼표와 마침표를 이용해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자 머리 속에서 곧바로 어떤 상황이 그려진다. 앞서 나열한 단어는 모두 인간의 걸음을 방해하고 상처 주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절벽을 마주한 이는 돌아서서 새로운 길을 찾았을까 아니면 빗물에 젖은 바닥을 밟고 미끄러져 절벽 아래로 떨어졌을까. 혹은 피로한 발과 내리는 비에 외출조차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조은시는 상황적⋅조형적으로 서로 닮은 요소들을 한 화면 아래에 배치하여 내러티브를 구축한다. 조형 요소들을 분석하고 읽어내려는 우리의 인지적 작용을 이용하여 상상의 사건을 발생시키고 그 전개 과정을 보여준다. <속상한 날 Distressed Day>에서 우리는 나무에서 떨어지는 붉은 색의 물체를 화면 오른편에 나열된 폭력적인 도구와 연결해 나무에 가해지는 폭력을 작품의 주제로 추측해 본다(도 1). 작품의 제목은 이러한 상상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배수진 Have One’s Retreat Cut Off> 역시 화면의 구성 요소들은 사건 발생의 메커니즘으로 기능하며, 배열된 사각 프레임을 연결하여 하나의 사건으로 읽게 만든다. 상공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전투기의 실루엣은 비행 슈팅 게임의 장면과 연결되어 그다음 상황을 예측하게 한다. 그렇다면 작가가 일련의 사건을 화면에 매번 등장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 1) <속상한 날 Distressed Day>, 2023, oil on canvas, 162.2 x 112.1 cm
숲 그리고 나무, 과일과 폭탄 그리고 운석과 사냥총 그리고 화산 폭발, 스프링클러 그리고 숲.
<자연의 섭리 The Providence of Nature>에서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다(도 2). 이번에도 중앙의 총을 기준으로 화면은 분할되어 있으며 붉은색의 곡선이 사건의 발생 순서를 일러주는 듯하다. 그러나 화면 아래의 알에서 위의 새로 그리고 또다시 알로 우리의 시선은 특정한 시작과 끝이 없이 원을 그리며 반복해 돌게 된다. 왼쪽에는 벌레를 사냥 중인 새의 모습이 담긴 직사각형의 프레임이, 오른쪽에는 새를 사냥 중인 사냥꾼의 모습이 그려진 직사각형의 프레임이 배치되어 있다. 사냥이라는 동일한 사건이 사냥 대상만 바뀌어 반복되고 있으며, 새는 사냥하던 생물에서 사냥당하는 생물로 변하고 곡선을 따라 죽은 새는 또다시 알에서 부화하여 곤충을 잡아먹는 새가 된다. 탄생과 죽음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새총을 만들어낸 문명과 인간이 순환하는 세계에서 벗어난 최상위 포식자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시작과 끝을 지정할 수 없는 순환적인 사건, 그리고 형태만 달리한 채 연쇄적으로 나타나는 사건의 연결구조를 드러내어 우리는 하나의 뿌리를 가짐을 보여주는 것이다.
<같은 마음 Same Way>에서는 폭발하는 화산과 스프링클러의 분출 이미지의 닮음을 통해 이를 다시 한번 보여준다(도 3). 아래의 공룡 뼈가 암시하듯 하나는 생명체를 삼켜 죽음으로 데려갈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장을 촉진시키고 생명력을 부여할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 터져 나오듯 분출되는 모습은 매우 닮아있으며, 이는 작가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파괴와 구축, 소멸과 재생이 사실은 이원 구조, 이원 체계가 아닌 하나의 세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작품들 속 구획된 화면은 자연과 문명, 동물과 인간의 이원적 대립의 장을 보여주고 그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 아닌, 사실은 매우 닮아있는 동일한 하나의 세계임을 비교해 보여주는 것이다. 작가의 조형 언어를 빌려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나무로 숲이라는 전체 속에 속해있다.
(도 2) <자연의 섭리 The Providence of Nature>, 2023, oil on canvas, 72.7 x 53.0 cm
(도 3) <같은 마음 Same Way>, 2023, oil on canvas, 100.0 x 80.3 cm
나무 그리고 나무 그림 그리고 나무판자 그리고 가짜나무.
나아가 작가는 숲과 나무, 나무와 숲의 관계를 캔버스 화면 안 가상의 세계에만 구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실 세계로 확장하고자 한다. 구획된 화면 내에서만 순환하고 기능하던 요소들은 나무판자를 경유해 현실 세계와의 접촉을 시도한다. 가장 먼저 <가짜나무와 벌집 Fake Tree and Honeycomb>에서 실행되었다(도 4). 나무판자 위에 나무가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려진 나무는 실제의 온전한 나무를 재현한 것이 아닌 가공된 나무 즉,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가짜 나무를 재현한 것이다. 캔버스 역할을 하고 있는 현실 세계의 나무판자는 판자 나무와 하나가 되어 재현된 판자 나무의 실제 뒷부분이 된다. 혹은 그림을 관념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받쳐주는 부수적인 역할이 아닌 판자 나무의 원형으로 숨겨진 실제 주인공일 수도 있다. 이렇듯 부분과 전체, 재현과 실재의 관계에 대해 유쾌하게 질문한다. <먼 친척 A Distant Relative>에서는 재현된 세계⋅모방된 세계에 있는 소용돌이와 이데아의 모방일지도 모를 현실 세계의 물을 연결하고, <말썽쟁이 Scallywag>에서는 영화 ‘델마와 루이스’의 마지막 장면을 차용해 가상의 세계를 벗어난 현실 세계로의 착지를 시도한다(도 5). 반대되는 물살이 만나 형성되는 소용돌이, 서로 다른 공기의 흐름이 만나 생성되는 태풍, 이들은 이제 현실 세계와 연결되었다. 우리는 더욱 커진 소용돌이와 태풍에 휩쓸리게 될까, 소용돌이와 태풍이 소멸된 공간에 서게 될까.
(도 4) <가짜나무와 벌집 Fake Tree and Honeycomb>, 2023, oil on panel, 80 x 30 x 35 cm
(도 5) <먼 친척 A Distant Relative>, 2023,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도 5) <먼 친척 A Distant Relative>, 2023,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